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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소설 읽는 여자

여행, 여기서 행복할 것 <모든 요일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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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요일의 여행>

김민철 저 ∥ 북라이프


“예전 책에

'여기서 행복할 것' 이라고

써두었더니

누군가 나에게 일러 주었다.

'여기서 행복할 것' 의 줄임말이

'여행'이라고.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작 <모든 요일의 기록>에서 담백한 문장으로 “일상”에 대한 사려 깊은 관찰과 성찰을 그려냈던 김민철 작가가 이번엔 ‘여행’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모든 요일의 여행>은 여행에 관한 책이지만 단지 여행 이야기가 아니다. 카피라이터라는 직업대신 여행 전문가라고 불리어도 무방할 만큼 풍부한 여행 경험을 가진 작가임에도 책 속에 “여행하는 법”이나 “여행지 소개” 같은 실용적인 정보는 일절 없다. 다만 ‘기록하는 여행자’로서 낯선 땅에서 낯선 이들이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일상’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진솔한 글로 차분히 발견해내고 있다.


해외 여행이라면 겨우 1년에 몇 박 몇 일, 가까운 일본이나 동남아 패키지 정도밖에는 엄두를 낼 수 없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일 년에 한 달이나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작가가 부럽기 짝이 없지만, 이 질투 나는 여행에서 작가는 아이러니한 진리를 포착해낸다.


우리가 여행지에서 가장 “여행답다”고 느끼는 어떤 순간이란 바로 낯선 나라에서 낯선 이들의 평범한 “일상”을 지켜보면서 느끼는 감흥이라는 점을 간파해낸 것이다. 에펠탑의 화려한 불꽃놀이, 죽기 전에 가봐야 할 관광명소, 블로거들이 강추 하는 맛집, 반드시 사야할 쇼핑 리스트 목록을 완성해가는 것또한 물론 여행의 큰 재미이겠지만, 결국 여행의 진정한 매력이란 “일상을 떠났으면서 다시 일상에 도착하고 싶다는 이 모순. (p.29)”에서 온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긴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에서 여행을 떠난 사람들의 심리 상태를 가리켜 집을 떠나와서 가장 집처럼 아늑한 곳을 찾아 헤매는 과정이라고 얘기하기도 했는데,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새롭다.


“집 나가면

몸이 고생이다.

하지만

집을 나가지 않으면

마음이 고생이다.”


“대단한 무언가를

보기 위해 떠나온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무것도 아니지 않게 여기게 되는

그 마음을 만나기 위해 떠나온 것이다.”



마치 미션 클리어하듯 한정된 시간 안에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먹고, 더 많은 것을 하려는 욕심을 버리고 “지금, 여기”의 시간에 집중하는 작가의 여행은 읽는 내내 공감을 준다. 한 때 남들 다 가본 데, 남들 다 먹어본 거 먹는데, 남들 다 사들고 온 물건들 쇼핑하느라 “바로 지금”의 여행지에서 감동을 느낄 여유도 없이 그저 다음 계획표에 전전긍긍해했던 여행을 생각해본다. 


이런 경험은 여행 초보라면 누구나 겪을 수 밖에 없기에 특별히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사실이다. 이후 차차 여행할 기회가 많아지고, 기간도 늘어나면서 조금씩 여행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여행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여행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그저 비가 오는 것뿐인데, 세상이 나를 등지는 느낌이 든다. 그저 몇 개의 가게가 문 닫았을 뿐인데, 세상이 나를 향해 문을 닫는 느낌이다. 한 가게 주인이 나에게 불친절했을 뿐인데, 온 도시가 나에게 불친절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저 길을 잘 못 찾았을 뿐인데, 이 여행 전체가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이런 마음의 과장법은 순식간에 여행자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려 버린다.” p.81


지난 여행의 기억을 떠올려본다. 여행 가이드에 나오는 명소들을 본 것도 좋았지만, 정작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고 추억으로 남은 것은, 현지 사람들이 가는 시장에 들러 맛있는 과일을 사왔던 기억, 며칠이나마 동네 식당의 단골이 되어 가게 주인과 짧은 영어로 소소한 아침 인사를 나눴던 추억, 그 곳 사람들 속에 섞여 일상의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산책했던 순간들이다. <모든 요일의 여행>을 읽으며 특별히 공감한 이유 또한 바로 그런 감성이 통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예감은 정확했다. 바쁘게 회사 일을 하다가 문득, 밥을 먹다가 문득, 지하철 안에서 문득, 이상하게도 문득문득 생각나는 것은 그런 순간들이다. 너무 아무것도 아니라서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순간들. 그리하여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그리움들. 이런 그리움이 유난히 지독한 날에는 약이 없다. 다시 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다. 유용한 시간을 그만두고 무용한 시간을 찾아 길 위에 다시 설 수밖에 없다. p.164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중해 기행>



작가는 남에게 자랑할만한 ‘전리품’들을 가득 갖고 돌아오는 여행이 아니라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에 집중하면서 ‘나만의 여행을 직조하는 기쁨’을 느껴보라고 넌지시 얘기를 건넨다.


완벽한 여행은 오직 남의 sns에만 존재할 뿐이다.” p.112


"여행은 한 치의 오류도 없이 목적지 앞에 세워주는 관광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시작되는 게 아니다. 실수로 이상한 버스에 올라탄 순간, 그 이상한 버스를 나도 모르게 선택해버린 순간, 나만의 여행은 직조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p.131



이상한 버스를 타고, 무용한 시간들 속을 거닐고 싶다. 그러다가 작가가 찾아 갔다던 이탈리아 토스카니의 작은 마을, 판자노의 체키니 정육점에서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맛있는 쇠고기 스테이크 무한 리필의 감동을 느껴볼 수 있다면 더욱 행복하겠지. 혹시 이것조차  “너만의 여행을 직조해야지!”라고 핀잔을 줄 사람은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