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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TV

<비밀의 숲>, 마지막 1분까지 더할 나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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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1분까지 더없이 완벽했다.

한 줄 한 줄 마치 거미줄을 치듯 조심스러우면서도 치밀하고 탄탄하게 쌓아온 이야기는 결말을 향해 갈수록 빈틈없이 아귀를 맞추며 에너지를 폭발시켰다.



<비밀의 숲>, 주제 의식의 정수 ‘이창준의 편지’와 ‘황시목의 약속’

무엇보다 이창준의 편지 씬과 황시목의 TV 출연 장면은 이 드라마가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달려왔는지를 압축하는 명장면이자 한 문장 한 문장을 복기하게 만들만큼 완벽한 대본이었다. 단지 드라마의 캐릭터를 위해 창작된 대사를 뛰어 넘어, 세월호, 국정 농단과 촛불 혁명을 겪으면서 지금 이 시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느끼는 슬픔과 분노, 저항감의 근원이 무엇인지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다. 작가 자신이 동시대인으로서 치열한 고민과 공감이 없었다면 써 낼 수 없는 ‘진짜 말’이다.




매력적인 캐릭터 ‘이창준’의 탄생, 배우 '유재명'의 발견

처음부터 모호한 회색 톤을 유지하며 이창준이라는 매력적이면서도 복잡한 캐릭터를 연기해낸 유재명은 오랜 세월 연극 무대에서 무명의 시간을 견디며 쉼 없이 자신을 단련해온 배우만이 뿜어낼 수 있는 ‘진짜의 오라(aura)’를 유감 없이 보여줬다.

대중에게 그를 알린 것이 ‘응답하라 1988’이었고, 범상치 않은 연기력을 발견하게 해준 작품이 ‘굿와이프’였다면 ‘비밀의 숲’은 드물게 세련된 연기를 하는 중년 배우 유재명을 각인 시켜준 드라마가 될 것 같다.



특히 배우로서 한계가 될 뻔한 부산 사투리 억양을 오히려 ‘이창준’이라는 인물에 대한 현실성과 카리스마를 부여하는 도구로 활용한 점은 대단히 놀랍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조승우 또한 경상도 억양을 가진 검사를 연기하는데, 이는 그저 출신지로서의 경상도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 ‘경상도 출신의 출세한 전문직 남자-특히 법률계와 정치계에 진출한’ 를 대변하는 전형적인 설정이라는 점에서 유사한 점이 있다.)

물론 송강호, 김윤석 등 경상도 억양이 남아있는 독특한 대사 톤을 자신만의 개성으로 만든 명배우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유재명은 더 강한 네이티브의 억양이 남아 있는 탓에 잘못했다간 연기가 촌스러워 보일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응팔에서 학주를 떠올려 보라. 그 때나 지금이나 같은 경상도 사투리를 쓰지만 완벽하게 다른 색깔로 다가온다. 그렇다. 연기란 그런 것, 배우란 그런 존재다. 한계를 뛰어 넘어 ‘자기 자신을 무기로 활용할 수 있는 괴물들’ 말이다.


   


‘angry sexy', 조승우는 완벽했다!

데뷔 이래 언제나 참 좋았던 조승우의 연기는 <비밀의 숲>을 기점으로 이제 또래 배우, 아니 현재 한국 남자 배우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자신만의 경지에 오른 느낌이다. 이성이 앞서는 냉철하고 지적인 인간인 동시에 ‘우리’라는 흔한 말 한마디, 동료가 그려준 낙서 같은 그림 한 컷에 미세하게 흔들리는 인간적 감정까지 극단의 양면성을 이토록 설득력 있게 연기할 배우는 흔치 않다. 그러면서도 지루하거나 일관성 없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느낌이 아니라 캐릭터에 풍성함과 다양함을 불어 넣을 수 있는 내공은 아무 배우가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특히 상대역과 1:1로 맞붙는 씬에서 조승우의 저력은 폭발한다. 한조 그룹에 대한 비밀을 감춘 영장관을 압박하는 씬이나, 박무성을 죽이고 김가영을 상해한 범인으로 체포된 윤과장을 취조 하는 씬, 이창준과의 투샷에서 드러나는 카리스마는 “angry sexy' 같은 말까지 만들어 붙여주고 싶을 정도다.

한 가지 바라는 점은 뮤지컬도 좋지만 그에 더해서 드라마, 영화에서 좀 더 다작 좀 해주시라는 것! 이 정도 재능 있는 배우들이 자꾸 작품 가리고 이미지 관리하며 세월 보내는 것은 일종의 직무유기라고 봄.(물론 조배우가 그렇다는 말은 아니고!)


배두나의 배두나만의 ‘한여진’

배두나가 없었다면 <비밀의 숲>이라는 드라마가 얼마나 황량해졌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물론 여배우가 남자들만 나오는 무겁고 칙칙한 드라마를 밝혀주는 꽃 같은 존재 뭐 이런 성차별적 평가는 절대 아니다. 배우 배두나만이 가진 사랑스러움, 귀여움, 자연스러움, 따뜻함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몇 초 되지 않는 대사에서조차 손가락 하나, 얼굴 근육 하나하나가 다르게 움직이며 살아있는 배두나의 풍성한 연기는 단연, 이 드라마를 보고 또 보게 만드는 매력 중에 하나였다.

무엇보다 불쌍하고 힘든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대우와 사회의 폭력에 대해 한여진 경위가 분노하는 씬들은, 대목 대목 우리 사회의 부조리들이 오버랩되며 뭉클하게 다가왔다.



박무성의 아들이 형사 동료들에 의해서 취조 중 가혹 행위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특임 팀에서 일하며 비로소 2년 만에 숨을 쉴 수 있었다고 토로하는 윤과장을 향해 인간적인 이해에 흔들리기보다 원칙이 무엇인지를 냉철하게 지적해주는 대목은 <비밀의 숲>에서 한여진 경위의 존재감을 드러내주는 장면이다. 앞으로 범죄 수사 장르물에서 남자 캐릭터들 속에 성비를 맞추는 감초 역할이나 ‘꽃’으로서 여형사 캐릭터는 배두나의 연기 이후 퇴출 될지도 모른다.




또한 무감정한 황시목에 대해 연민인지 연정인지 모를, 그러나 유일하게 따뜻한 케미를 뿜어내는 귀여운 씬들은 배두나가 조승우를 살려주는 장면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발 ‘남녀주인공 연애금지’를 바랐지만, 막상 결론을 보며 서운한 맘, 설레는 맘이 반반이었던 건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 같다. 안사귀어도 좋으니 한여진 덕분에 외톨이 황시목의 ‘나홀로 산다’가 좀 덜 외로워지길 바랄 뿐.



마지막으로 끝까지 '하나도 안 변하고 또~옥같은 서동재는, 한 인간이 인생의 엄청난 시련을 겪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위인전 혹은 자서전 속에나 있을 뿐 실제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지독한 현실을 일깨워준다. 그래,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위안이 되는 것은, “어차피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는 게 사실이라면, 황시목, 한여진 또한 변하지 않을 것이고, 세상 어딘가에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 인간’들이 남아 있기에 그래도 희망이 있다는 것. 따지고 보면 이창준 또한 재벌 사위가 되어 썩은 세상에 발을 담구었지만 그래도 쉽게 변할수 없는 인간이었기에 끝내 스스로 제물이 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비밀의 숲>은 첫 회 첫 씬 부터 마지막 1분 1초까지 단 한 순간도 실망시키지 않은 드라마였다. 마지막 회의 엔딩 크레딧을 봤던 그 순간의 기분으로 말하자면, 만약 별점을 줘야한다면 세상의 모든 별점을 다 주고 싶을 정도였다. 낯간지럽지만 황시목, 한여진, 이창준 그 외 모든 드라마 속 인물들과 작별해야한다는 것이 실제처럼 허전하고 아쉬운 마음이 든다. 이런 기분 참 오랜만이다.


앞으로 <비밀의 숲>을 떠나보낸 아쉬움을 달래줄 드라마가 또 나올 수 있을까?

<비밀의 숲>은 한국드라마 장르물의 기준을 거의 혁명적으로 진보시켰고, 이제 너무 눈높이가 높아져서 어지간한 드라마에는 감흥도 없을 것 같다. 아마도 한국 드라마 장르물은 <비밀의 숲>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다. 뭐 앞으로 드라마를 제작해야 하는 이들에게는 엄청난 부담이겠지만 하루에도 수십 개의 드라마 시리즈가 방영되는 드라마 천국 대한민국에서, 그만큼이나 지루하고 맥락 없는 PPL과 60초 중간광고의 홍수를 견뎌주는 시청자들 입장에서 이쯤 되면 이 정도 수준의 드라마를 볼 권리는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