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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두스의 "맛" 이야기/"맛"있는 이야기

니가 인생의 매운 맛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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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땐 안 맵고, 안 짜고, 안 달고 좌우간 담백한 음식이 좋았다. 

 대학 시절 친구나 선배들은 “멀겋게 생겨서 입맛도 멀겋다”며 쫄면 대신 우동만 먹는 나를 자주 디스하곤 했다. 

 

 하지만 맵고 짠 거 못 먹어서 “인생의 매운 맛을 모르던 그 짜식”은 언젠가부터 향신료 물씬한 좀 센 음식을 좋아하게 되었다.


 사회 생활하며 외식을 많이 하다 보니 입맛이 자극적으로 변하게 된 건가……. 

 어쩌면 없는 솜씨로 요리를 하고 난 뒤 뭔가 심심하고 부족한 것을 ‘청양 고추’와 ‘참기름 듬뿍’으로 수습하면서 생긴 습관인가? 다행히 아직 ‘단짠단짠’만은 좀체 거부감이 드니 미각이 완전히 죽은 건 아니라고 위로해본다.

 

 아무튼! 그런 내 입맛에 아주 흡족한 음식이 바로 동남아풍의 요리들이다. 

 그 중에서도 “똠얌꿍”은 완전! 막! 그냥! 막! 너무 좋다. 그런데 실은 이름조차 이국미 물씬한 똠얌꿍을 처음 만난 곳은 태국도 동남아도 아닌 대한민국 여의도에서였다. 

 

 같이 일하던 상사는 외모가 영판 태국 부자 같은 사람이 취향마저 태국 음식 및 태국 마사지 마니아였는데, 어느 날 회사 근처에 타이 레스토랑이 새로 문을 열었다며 나와 동료들을 데려간 것이다.


 “똠얌꿍 먹어봤니?”


 “그게 음식 이름인가요?”


 그랬다, 그 전까지 먹어본 동남아 음식이라곤 “베트남 쌀국수” 정도? 짜장면에 탕수육 곁들이듯 세트로 먹어줘야 되는 줄 알았던 “파인애플 볶음밥?” 혹은 대단히 잘 먹은 날 메뉴로 당당히 꼽히는 “월남쌈” 정도가 전부인 내 인생에서 그 날은 태국 요리에 입문한 역사적인 날이 되었다.


 “태국 음식이 세계 5대 요리인거 알지? (몰랐다;;) 


 그 중에서도 백미가 바로 똠얌꿍이야.”


 나머지 세계 4대 요리에 대해 들어볼 새도 없이 마침 주문한 ‘똠얌꿍’이 나왔다. 시뻘건 국물이 김치찌개 같기도, 순두부찌개 같기도 한 비주얼인데, 고명으로 미나리 같은 퍼런 풀잎(알고 보니 고수였음)과 큼직하게 썬 양송이버섯, 오동통한 새우가 몇 마리 둥둥 떠 있었다. ‘꿍’이 태국말로 ‘새우’라며 상사가 친절한 설명을 곁들였다.


 ‘쳇, 대체 얼마나 대단한 맛이기에’ 하고 한 입 맛보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맵고, 시고, 달고, 속이 시원하고, 살짝 구수한 감칠맛까지 이 모든 맛이 한꺼번에 입안을 감싸며 목을 타내려 가는데 여기에 뭔가 내가 설명할 수 없는 풍미가 있었다.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어떤 맛과 향임에 분명한 그것은 생각해보니 미지의 향신료들이었던 것 같다.


 



 한국 사람들은 열에 여덟이 빼달라고 한다는 고수도 전혀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신맛, 그냥 식초의 막 신 맛이 아닌 짠 맛인 듯 시큼한 맛, 오묘한 향기와 함께 하는 그 독특한 신맛의 근원이 다름 아닌 ‘레몬 그래스’라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삼복이라 더운데, 매운데, 국물을 남길 수가 없었다. 그릇에 고개를 박고 열심히 흡입하다 건너편 상사의 얼굴을 보니 이미 방콕에 가 계신 중. 그렇지 않아도 땀이 유독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얼굴에서 온천 터지듯 땀샘이 폭발하며, 온 몸으로 똠얌꿍을 음미하고 있었다.


 그 날 이후 몇 번이나 친구들을 데리고 그 태국 식당에 가서 똠얌꿍을 먹었다. 반응은 의외로 호불호가 좀 나뉘었는데, “세계 5대 요리인 태국 음식 중에서도 백미가 바로 똠얌꿍이란다." 그렇게 설명하면 대개는 맛보다 문화 체험 정도의 의미에서 수긍하고들 했다. 

 그나저나 그 식당 지금도 여전히 성업 중이겠지?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꽤나 많이도 먹었건만, 이런 날 올 줄을 모르고 사진 한 장을 안 찍어두었다. 위는 남이 찍은 사진.

 

 해외 나가서도 온통 느끼한 것들로 채워진 위장이 참을 수 없이 들뜬 느낌이 들 때, 그러나 김치찌개 따위 한국 음식으로 호사를 누릴 여건이 안 될 때, 태국 음식점에서 똠얌꿍을 먹었다. 

 아쉽게도 그 똠얌꿍은 내가 상상하던 그 똠얌꿍 맛이 아니다. 뭔가 허전하고 멀건 것이 첫 술을 넘기자마자 눈 앞에 가성비 계산기가 펼쳐지며 곧장 후회가 밀려오는 맛이랄까.


 그리고 나는 분명 메인 요리로 생각했는데, 태국 식당의 메뉴판에서 똠얌꿍은 전채 요리에 해당했다. 따라서 면도 밥도 없이 그냥 국물만 준다. 아마도 내가 좋아한 똠얌꿍은 한국에서 한국 사람이 좋아하는 입맛으로 현지화된 똠얌꿍이었던 것 같다.

 게다가 여의도 태국 음식점에서 파는 똠얌꿍은 쫄깃쫄깃한 면이 들어가 있는, 말하자면 태국식 짬뽕면 같은(게 있다면), 또한 거부감 느껴지는 향신료를 적당히 뺀 한국형 퓨전 똠얌꿍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어쩌면 오리지널이 아닌 변종의 맛에 반했던 것일지도…….


 그 뒤로 태국에 가서 먹은 똠얌꿍은 참 맛있었다. 태국은 어딜 가나, 심지어 시장 노점 아무데서나 사 먹는 천 원짜리 쌀국수조차도 너무너무 맛있으니까 뭐. 아! 태국 가고 싶다. 아니 여의도 똠얌꿍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