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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TV

<비밀의 숲>, 황시목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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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백만 불짜리’ 웃음을 보기위해 무려 4주를 참았다. 그의 미소(‘라고 쓰고 박장대소라고 읽는다’고 하는...)가 앞으로 어떻게 풍성해지는지 지켜보기 위해서 남은 4주도 눈을 떼지 못할 것 같다.


회를 거듭할수록 드라마 <비밀의 숲>에 빠져드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드라마가 가진 ‘세련됨’ 때문이다. 

<비밀의 숲>은 주인공인 검사가 살인 사건의 범인을 밝혀내기 위해 얽히고설킨 사건의 퍼즐을 풀어가는 전형적인 범죄 장르물이다. 흥미진진한 스토리 라인, 배우들의 명연기, 의상, 미술, 정교하고 화끈한 CG 같은 비주얼 요소 등 ‘웰-메이드(well-made)’ 장르물이 되기 위한 미덕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나 같은 경우 '세련된 감성'을 느낄 때 웰 메이드(well-made)라는 말을 쓰게 되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비밀의 숲>은 근래 TV에서 보기 드문 “웰 메이드(well-made)"드라마이다.



세련된 배우들의 세련된 연기 - ①조승우의 정교함


드라마의 세련미를 완성하는 정점은 단연 배우들의 연기다. ‘황시목’ 역할을 맡은 주인공 조승우의 연기는 볼수록 놀랍다. 감정을 거의 느낄 수 없는 한 인간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각성해가는 과정을 이렇게 설득력 있게 연기할 수 있는 배우는 조승우 말고 없을 것 같다. 조승우의 연기는 실제로 황시목처럼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이 어딘가에 있다면 꼭 저럴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게 만든다.


가창력으로 내지르지 않고 조용히 읊조리는 내공 깊은 가수를 보는 느낌. 대체로 무덤덤한 표정조차도 나노 단위로 쪼개서 정교하게 연기하는 모습은 감탄스러울 지경이다. 





세련된 배우들의 세련된 연기 - ②배두나의 존재감


자칫 “남자 주인공의 드라마”, “조승우의 원맨쇼”로 흘러갈 수 있는 드라마를 배두나라는 걸출한 배우는 그냥 두고 보지 않는다. 하지만 작정하고 튀려고 덤비는 여주인공이 아니다. 절대적인 분량으로 보자면 황시목에 비해 비중이 약하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여진 없는 황시목은 상상하기 힘든 존재감을 자랑한다. 

황시목이라는 캐릭터가 한여진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저 감정 없이 일만하는 매력 없고 드라이한 캐릭터로 남았을 것이다. 따뜻하면서도 귀엽고 자연스러운 매력이 넘치는 한여진이라는 캐릭터는 황시목의 인간미를 끄집어내주는 핵심 역할을 한다.



만약 조승우 혼자서 드라마를 짊어졌다면 어땠을까? 배우 조승우의 엄청난 매력과는 별개로 한편으로는 살짝 질렸을 것 같다. 앞서 방송됐던 많은 ‘검사 주인공 범죄 드라마’들의 경우 남자 주인공의 지나친 등장과 과잉된 감정, 폭발하는 에너지 때문에 초반까지 집중하다가 후반부에 가서는 채널을 돌려버린 경우가 많지 않았던가.


또한 이런 구도의 드라마에서 그들의 부담스럽도록 넘치는 정의감과 자신감은 여주인공을 부속물로 만드는 경우가 허다했다. 아마도 이전 드라마들도 처음 설계에서는 ‘한여진’ 같은 여주의 역할을 기대했을 것이다. 아쉽지만 중요한 사실은 그녀들이 해내지 못한 그것을 배두나는 아주 세련되게 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세련된 대본


사건이 벌어졌고, 의심되는 용의자만도 열 손가락을 채울 지경이다. 몹시도 복잡하게 돌아가는 이야기 속에서 매회 하나씩 새로운 ‘유력 용의자’가 부각된다. ‘이번 화에서는 이렇게 흘러가겠지’ 하는 스토리 또한 관객들의 예상을 비껴가며 뻔하지 않게 전개된다.


탁월한 점은 거의 매회 반전이 등장하지만 밑도 끝도 없는 반전을 들이밀며 시청자들에게 ‘드라마적 허용’을 강요하면서 무조건 ‘반전’이니까 받아들이라고 몰아치지 않는다는 것. <비밀의 숲>은 보는 사람의 허를 찌르면서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게끔 세련된 수를 내놓는다. 작가의 수는 이미 시청자의 두, 세 단계 위에서 내려 보는 듯한 느낌이다. (신인이라고 알려진 이수연 작가의 엄청난 가능성이 기대된다.)


   

"나는 당한 사람도 당한 사람이지만 

내가 매일 보는 동료들이 

내 옆에 완전 보통사람들이 이러는게 

나는 이게 더 안돼요 이게 받아들이는게, 

저 사람들이 죄다 처음부터 잔인하고 악마여서 저러겠어요. 

하다보니까 되니까 그러는 거예요. 

눈 감아주고 침묵하니까 

누구 하나만 제대로 부릅뜨고 짖어주면 바꿀 수 있어요."

 

"2주 후에 무사 방면이냐 장기간의 구금이냐 경위님이 선택하세요."

 (중략)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유로 선택을 빙자한 
침묵을 강요받을까요, 난 타협할 수 없어요. 
난 타협 안합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인권 문제는 전문가한테 맡기는 걸로"  

가령 한여진이 박무성의 아들에게 가혹 행위를 한 동료들에게 분개하는 장면은 단지 한여진이라는 캐릭터의 정의감을 돋보이게 하려는 에피소드로 사용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큰 그림으로 이어진다. 또 스토리 구성 뿐 아니라 등장 인물들들의 개별 대사 톤에서도 세련미가 느껴진다. 그녀의 선택을 이끌어내는 조승우의 대사는 흔한 윽박지르기가 아닌 철저하게 계산된 그 캐릭터다운 표현이다.



세련된 연출


<비밀의 숲>이 가진 톤은 어둡다. 그러나 자칫 잘못 ‘다크’했다가는 채널 돌아가기 좋은 우울하고 답답한 다크함이 아니다. <비밀의 숲>은 그 다크함 조차 세련되게 느껴진다. 예를 들어 조승우를 비추는 앵글은 영드 “셜록”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세트와 분위기는 일본 드라마 장르물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대체로 톤 다운된 어두운 화면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에너지가 느껴진다.


주로 본방을 보고 나면 따로 인터넷 동영상은 보지 않게 되는데, 비밀의 숲은 보고 또 봐도 질리기는커녕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풍부한 정서가 숨어 있다. 수 없는 드라마에서 무수히 보아왔을 평범한 포장마차 씬 조차도 뭔가 새롭다. 바로 정교한 연출의 힘이다.


무엇보다 삼복 더위에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무려 코트를 입고 등장함에도 때 지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그 차갑고도 애매한 서늘함이 드라마의 톤과 너무나 잘 맞아 떨어진다. 특히 감정이 메마른 황시목의 황량한 정서와 그의 무채색 코트, 이만한 그레이트 케미스트리(grate chemistry)가 또 있을까!


쓰다 보니 주로 주인공들을 언급했지만 이창준 검사장을 비롯해 한여진의 형사팀 동료들, 심지어 한 회에 한 번 등장하고사라지는 단역조차 전형적인 연기 톤을 벗어난 신선함이 있다.


드라마 <비밀의 숲>이 뿜어내는 세련됨은 이러한 모든 요소들이 매우 양질의 수준에서 집약되어 시너지를 일으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넘치지 않고, 대놓고 과시하지 않고, 딱 그 임계점에서 저절로 발산되는 한 차원 높은 세련됨이다. 모처럼 “나 요즘 이 드라마 본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세련된 드라마가 나타났다.